보좌 앞에서의 놀이 Play Before the Throne

클린턴 맨리
Clinton Manley

“놀이할 수 없다면, 당신이 바라보는 하나님이 너무 작은 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리 와서 같이 놀아요!”

집 문턱을 채 넘기도 전에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하지만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마음은 여전히 일터에 머물러 있고, 머릿속은 온갖 잠재적 문제들로 가득한 상태인 나는 도저히 놀이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정중하게 아이들의 초대를 거절한 뒤, 정작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일은 꽤 자주 일어난다. 대체 왜일까? 무엇이 우리를 놀지 못하게 막는 것일까? 한 시인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행복한 재능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구체적으로 옳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는 이것이 습득하기 매우 어려운 재능임을 깨닫는다. C.S. 루이스가 《말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희락주의의 “고된 훈련”의 일부인 셈이다. 이 재능에서만큼은 우리 집 어린아이들이 나를 훨씬 능가한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놀았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지만, 굳이 묻지 않겠다. 대신 우리는 왜 더 많이 놀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 그 이유와 해결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하나님이 설계하신 ‘호모 루덴스(Homo Ludens)’—즉, 놀이하는 인간의 모습을 먼저 숙고해 보자.

놀이—진심인가?

그렇다, 진심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놀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할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놀이와는 상관없는 책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며,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놀이를 가리켜 “그 이상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영혼의 즐거움만을 바라는 말이나 행동”이라는 유용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다시 말해, 놀이란 단순히 그 행위가 주는 기쁨 자체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놀이를 영혼을 위한 일종의 휴식으로 인식했다. 몸에 휴식이 필요하듯 영혼에도 휴식이 필요하며, “영혼의 휴식은 곧 기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놀이를 ‘레크리에이션(re-creation, 재창조)’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우리를 새롭게 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실제로 즐거운 마음은 양약과 같다(잠언 17:22).

성경은 이 그림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준다. 주로 ‘놀이’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웃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다. 이 동사를 강조하면 ‘스포츠를 즐기다, 놀다, 축하하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놀이는 행동에 대한 것이며, 웃음은 소리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웃음이 가장 좋을 때 기쁨을 표현하고 배가시키는 소리인 것처럼, 놀이 역시 기쁨을 표현하고 배가시키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놀이는 달리기, 독서, 요리, 식사, 보드게임, 스포츠, 역할극, 정원 가꾸기, 심지어 대화(외향적인 사람들에게는)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기쁨으로부터 비롯되고 기쁨을 위해 행해지는 한 거의 모든 활동을 포함할 수 있다. (아퀴나스에게는 《신학대전》을 집필하는 것 자체가 아마도 놀이였을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놀이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아는 ‘행복한 재능’은 고대인들에 따르면 하나의 덕목이다. 상상해 보라! 그들은 이를 ‘에우트라펠리아(eutrapelia)’라고 불렀는데, 이는 지혜와 절제를 가지고 휴식을 위해 놀이를 사용하는 습관을 뜻한다. 하나의 덕목으로서 놀이 본능은 두 가지 악덕 사이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다. 하나는 ‘놀지 못하는 병'(에비니저 스크루지를 생각해보라)이고, 다른 하나는 ‘놀이 중독'(지하방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 게이머 같은 상태)이다.

케빈 구시켄은 저서 《놀이 신학》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놀이 방식이 있고, 그렇지 않은 방식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놀이가 가장 온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삶의 순간들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과 허락”이 된다. 참으로 즐거운 일 아닌가?

성경을 펼치면 우리는 놀아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쾌한 즐거움의 원천이자 주권자이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항상 노는 중이시며,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쁨을 위해 행하신다(시편 115:3). 하지만 더 구체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그분의 즐거운 유희를 보게 된다.

세상은 지혜로운 놀이 속에서 시작되었고(잠언 8:30–31), 세상은 웃음과 놀이로 가득 차 있으며(욥기 39:18, 22; 40:20; 41:5, 29; 시편 104:26), 세상은 어린아이 같은 놀이로 끝을 맺을 것이다(스가랴 8:5; 이사야 11:8; 예레미야 30:19; 31:4; 말라기 4:2).

하나님은 자신의 세상에 놀이를 가득 채우셨고, 그분의 형상 대리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놀이 본능을 모방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신전 앞에서(coram Deo) 재창조하고, 게임과 스포츠를 즐기며, 뛰놀고 활기차게 즐기며, 모험하도록 우리를 지으셨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불러 함께 놀자고 하는 우리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성경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불러 함께 놀자고 하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는다. 우리는 왜 더 놀지 않는가?

통제욕은 놀이와 어울리지 않는다

첫째로, 우리는 너무 자주 불안에 시달린다. 현대 사회는 이 불안이라는 독주(毒酒)에 깊이 취해 있다. 이 치명적인 독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독극물이 있지만, 아마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만큼 강력한 것은 없을 것이다. 풍요로운 기술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몸, 우리의 삶, 우리의 세계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그 유혹에 쉽게 넘어진다! 그러나 통제하려는 우리의 마음과 달리, 우리의 경험은 전혀 다르다. 손바닥에 쥔 모래처럼,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통제권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결국 불가피하게 통제권이 사라질 때, 그 통제욕은 더 큰 불안을 낳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었을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혹은 우리처럼 통제권이 없는 타인)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놀이 중독으로 불안을 마비시키거나, 불안에 얼어붙어 놀지 못하는 병에 걸리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인에게 놀이터가 된다.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시며(진실로 그러하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하신다면(진실로 그러하다!), 나는 우주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진다. 어차피 작동하지도 않던 통제의 손길을 놓고,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을 즐거워할 수 있다. 로마서 8장 28절의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보좌 앞에서의 유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주권 아래에서 누리는 이러한 유희는 안식일의 핵심과 곧장 연결된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통제의 환상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일곱 번째 날의 안식을 제정하셨다. 백성들이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가 왕이시며, 그 왕이 그들을 위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놀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며, 안식일의 안식을 맛보게 한다.

궁극적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재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다. 복음은 악과 고통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물러가는 중이며, 지나간 일이고, 빠르게 사라지고 있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요한일서 2:8). 사탄은 이미 정복당한 영토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놀이는 어둠의 폭정에 맞서는 활기찬 저항 행위이며, 악의 궁극적 승리를 춤으로 부정하는 선언이다. 구시켄의 말은 정확하다.

“삶이 좋을 때만 놀이가 허용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을 그토록 강력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은혜롭게 만드는 것은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우리에게 놀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점이다.” (《놀이 신학》, 165)

놀이할 수 없다면, 당신이 바라보는 하나님이 너무 작은 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만 하고 놀지 못하는 삶

그러나 우리의 놀이를 가로막는 또 다른 문제가 있으니, 바로 일이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일, 즉 하나님의 안식과 균형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셉 피퍼가 그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언급한, 주 60시간씩 일하며 삶의 방식 자체가 되어버린 ‘전체 노동(total work)’을 뜻한다.

피퍼는 현대 사회가(칸트 등을 통해 교육받으며) ‘어려운 것일수록 좋은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관념을 믿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쉽게 얻어지거나 거저 주어지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가치 있는 일은 반드시 눈보라를 헤치고 산을 오르듯 피땀 흘려 쟁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며, 반드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쁨이 곧 미덕의 증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 노동의 사고방식은 오직 영혼의 즐거움을 위해 행하는 놀이를 경멸한다. 노동자에게는 이토록 비실용적인 일에 쓸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이 자신의 노동에 달려 있다고 믿기에 쉴 수조차 없다. 그는 고린도전서 4장 7절의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을 “네게 있는 것 중에 네가 노력해서 얻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로 바꾸어 버린다. 피퍼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개인의 내면적 황폐화”를 초래하며, “삶이 노동으로만 가득 찬 사람은 내면이 위축되고 오그라든다”고 경고한다(《여가: 문화의 기초》, 58). 일만 하고 놀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선물로 받지 못하는 메마른 인간이 되고 만다.

아버지를 향해 추는 아이들의 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거저 주어진다. 실제로 모든 것이 선물이다(사도행전 17:25). 사랑받는 자녀들은 이 사실을 안다. 그들도 일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자로 살지 않는다. 그들의 일과 놀이는 이미 받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들은 독생자 예수로 인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말씀을 신뢰한다(로마서 8:32). 대가도, 계약도 없다. 오직 전부 선물일 뿐이다.

놀이는 사랑을 거저 베푸시며 결코 행위로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행복한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번창한다. 놀이는 우리가 소망을 일이나 재물에 두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고 있음을 증명한다(디모데전서 6:17). 예수께서 천국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얼마나 자주 가르치셨는지 기억해 보라. 아버지를 신뢰하는 아이들이 그분 앞에서 마음껏 뛰노는 현실을 담아내려 하셨음이 분명하다. 탕자처럼, 그들은 아버지를 향해 기쁨의 춤을 춘다.

우리가 삶을 움켜쥐던 손귀를 풀고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부성적인 돌보심 안에서 안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놀이는 이 일을 경이롭게 수행한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족함, 그분의 사역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분의 피조물을 향한 우리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여, 와서 놀라! 당신의 여가를 위해 굳이 규칙을 나열하지는 않겠다(그것만큼 놀이답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세 가지 실천적인 조언을 건넨다.

첫째, 자신에게 어떤 활동이 즐거운지 발견하라. 우리는 모두 다르게 논다. 내게는 10마일을 달리는 것이 즐거운 유희이지만, 당신에게는 아닐 수 있다. 당신의 영혼에 안식을 주는 활동은 무엇인가? 스튜어트 브라운은 저서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에서 놀이의 일반적인 범주를 보여주는 여덟 가지 ‘놀이 인격(예술가, 수집가, 경쟁자, 지휘자, 탐험가, 장난꾸러기, 운동가, 스토리텔러)’을 제시했다.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라.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둘째, 그 활동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라. 놀기에 너무 바쁘다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만큼 그분을 온전히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 30분이라도 좋으니 여가를 계획하라. 매일 놀이하기를 힘쓰라. 꽃향기를 맡고, 계단을 뛰어내려 가 보고, 책을 읽고, 공을 던지라. 하나님이 주시는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누리라. 주님은 당신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셋째, 타인의 놀이를 도우라. 퇴근 후 아이들과 온몸으로 뒹구는 일이 내게는 놀이처럼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분명한 놀이다. 아이들의 놀이 성향이 나와 다를지라도 그 본능은 같다. 우리는 가족과 이웃에게 마음껏 뛰놀고 쉴 수 있는 자유, 하나님 안에서 춤추고 기뻐할 수 있는 자유를 줌으로써 그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놀이는 결국 함께 나눌 때 배가되는 즐거움이다.

성도여, 아버지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 보좌 앞에서의 유희를 마음껏 누리라.

클린턴 맨리(Clinton Manley)는 디자이어링 갓(Desiring God)의 편집장이자 베들레헴 대학 및 신대원(Bethlehem College and Seminary)의 외래 강사다. 아내 매켄지(Mackenzie)와 네 자녀와 함께 세인트폴에 거주한다.

원문 Play Before the Thr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