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사 오카야
Kazusa Okaya
“교회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는 예수와 일본을 향한 사랑을 바탕으로 자국의 군국주의화를 비판했다.”
지난해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일본 그리스도인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미국 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 민족주의를 수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막론하고 양국 그리스도인에게서 내 관점을 비판하는 이메일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를 여러 통 받았다.
어떤 이는 내가 일본과 기독교의 부정적인 역사만을 서술함으로써 좌파의 의도에 동조했으며, ‘반일’ 사상을 품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는 내가 크리스천투데이(CT)의 ‘깨어있는(woke) 척하는’ 의도에 이용당하는 세계적인 대변인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국의 정치 질서를 전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자국의 역사와 유산을 폄하하도록 강요받는 이분법의 시대에 직면해 있다. 전자는 이를 애국주의라 부르고 후자는 예언자적 증언이라 일컬으며, 서로를 향해 우상숭배라며 손가락질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민족주의적 행태를 거부하면서도,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국가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하는 일은 과연 가능한가?
이는 일본의 기독교 저술가이자 전도사, 그리고 교회 지도자였던 우치무라 간조(1861~1930)가 평생을 바쳐 고뇌했던 질문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일본을 향해 예언자적 비판을 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숨 막히는 두 이분법 사이의 중간 지대에 자리한다. 일본 역사학자 야기우 쿠니치카는 이 중간 지대를 ‘예언자적 민족주의’라고 명명했다. 우치무라는 당대 사람에게 민족주의자로 불릴 만큼 조국을 열렬히 사랑했으나, 국가의 민족주의적 의도에는 복종하지 않아 반역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두 가지 평가는 모두 사실이었으며, 이 모두는 그의 기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과 진보적 진영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시대에, 우리는 우치무라의 예언자적 목소리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우치무라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두 개의 ‘J’만을 사랑하며 세 번째는 없다. 하나는 예수(Jesus)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Japan)이다. 나는 예수 때문에 동포에게 ‘야소’라 불리며 미움을 받고, 일본 때문에 외국 선교사에게 민족주의적이고 편협하다며 배척당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친구를 잃을지언정 예수와 일본만큼은 결코 잃을 수 없다.”
우치무라는 메이지 유신이 수백 년간 이어진 봉건 통치를 뒤엎기 7년 전인 1861년,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별도의 명시가 없다면 모든 인용구와 역사적 사실은 존 하우스의 우치무라 전기인 《일본의 현대 예언자》 및 시부야 히로시가 편집한 《예수와 일본을 위한 삶》을 바탕으로 한다.) 당시 정부는 천황을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으로 규정하고 신도를 일본의 도덕적 근간으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경신애국(神을 공경하고 나라를 사랑함)’의 분위기 속에서 애국주의를 공기처럼 마시며 성장했다.
그는 16세 때 삿포로 농학교(현 홋카이도 대학)에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다. 그곳은 초대 교감인 윌리엄 클라크의 영향으로 회심한 상급생들이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곳이었다. 선배들이 우치무라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는 이를 일본과 조국의 신들을 향한 배신으로 여겨 거부했다. 그러나 이후 진정한 신앙보다는 동료들의 권유에 못 이겨 예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대학 졸업 후 우치무라는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내 고통스러운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자 했던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펜실베이니아 엘윈에 있는 장애 아동 기관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성경의 예언서들을 읽던 중 특히 예레미야서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조국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국 땅에서 비롯된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다소 사그라들었던 애국심이, 이제 백 배나 더 강렬한 활력과 감동으로 내게 되돌아왔다.”
1886년 여름 애머스트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는 영적 체험을 한다. 기독교의 본질이 자신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1888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어 조국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이자 일본인이라는 이중 정체성은 통제해야 할 모순이 아니라 사명이자 소명이었다. 그는 저서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영혼을 구원하는 법을 배웠고, 예언자들에게서 조국을 구원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고백했다. 초기에 우치무라는 일본과, 하나님이 세계 속에서 일본에 부여하신 역할에 대해 낙관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1891년 1월, 두 가지 사랑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시련이 찾아왔다. 당시 도쿄의 엘리트 교육기관인 제1고등중학교의 젊은 교사였던 우치무라는 천황이 친필 서명한 교육칙어 등본을 가리키는 봉환식에 참석했다. 이 공식 칙령은 국민에게 황실에 충성하고 ‘국가를 위해 용기 있게 자신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교감은 모든 교직원에게 차례로 나아가 천황의 친필 서명 앞에 머리를 숙여 깊이 절하라고 명령했다.
우치무라는 단상 앞으로 나아갔으나 가볍게 목례만 했을 뿐, 천황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이 불경 행위는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언론은 그를 천황 모독죄로 고발하며 반역자라 비난했다.
그는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친구 데이비드 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불교나 신도 의식에서 조상의 유물 앞에 절하던 방식으로 천황의 친필 서명에 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나는 내 신념을 지켰고 절하지 않았다!”
많은 학자는 우치무라의 이 행동을 의도적인 저항이라기보다 순간적인 양심의 발로로 보지만, 당시 천황의 신격화와 엄격한 종교적 통제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 예언자적 행동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1924년, 우치무라의 한 제자는 그가 “일본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정부가 주도하는 인간의 신격화에 있다”라고 말했던 것을 회상했다.
불경 사건 이후 우치무라는 병에 걸렸고 직장을 잃었으며, 자신을 간호하다 중병을 얻은 두 번째 아내마저 잃었다. 그러나 그는 회복과 동시에 왕성한 저술 활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이력을 쌓아나갔다.
국위 선양과 국민의 행복
1894년 여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일본이 아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국 중심적 시각에 사로잡혀 있던 우치무라는, 일본의 행위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외국인을 향해 이를 옹호하는 영문 기사를 기고했다. 현대 국가들은 정의로운 전쟁의 존재를 의심하지만, 일본은 비기독교 국가도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리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일본을 조선을 해방하기 위해 의로운 대의로 청나라와 싸우는 작고 진보적인 세력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만에 일본이 조선 해방이라는 명분 대신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일본은 이후 1910년 한국을 강점한다.) 승리로 고양되기는커녕 일본 대중은 도리어 잔인해졌다. 그는 동포들이 청나라 군인을 살해하는 모습을 마치 멧돼지 사냥을 하듯 축제처럼 즐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우치무라는 인쇄물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반성했다. 그는 일련의 에세이, 특히 유명한 《농부 아모스》와 《시세의 관찰》을 통해 예언자들의 날카로운 칼날을 자국 민족을 향해 겨누었다. 아모스 시대의 유대인은 “타인을 열등하게 여기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다른 나라는 망할지언정 우리 조국이 위험에 빠질 리 없다’라고 말했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일본을 향한 비유는 분명했다.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러했듯, 일본의 교만 역시 파멸을 불러오리라는 경고였다.
십 년 뒤 러일전쟁 전야에 이르러 그는 완전한 평화주의자로 돌아서며 전쟁을 시작부터 강력히 규탄했다. 전쟁은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이며, “그 어떤 개인이나 국가도 이러한 거대한 죄를 범함으로써 장기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다”라고 그는 역설했다. 복음과 십자가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신약성경 전체의 정신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우치무라는 자신이 성경 연구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군국주의적 민족주의를 지지했던 과거를 회개하면서, 그는 일본이 나아가야 할 더 나은 길을 모색했다. 복음의 빛 아래에서 일본이 위대해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가장 명확한 해답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지 1년 뒤인 1911년에 저술한 소책자 《덴마크국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덴마크는 1864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빼앗겼다. 군사력을 통한 강대국으로의 복귀라는 전통적인 길이 막히자, 덴마크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위그노 출신의 엔지니어 엔리코 달가스의 지도 아래, 유틀란트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농업을 일으켰으며, 농부들의 인내 어린 노동과 소박한 신앙의 실천을 통해 국가를 재건했다. 우치무라는 “덴마크인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 어디도 침략하지 않으며, 오직 국토의 조림과 신앙만으로 조국을 구원했다”라고 기록했다.
이는 소작농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군함을 자랑하고, 군함과 식민지의 수로 번영을 측정하던 일본의 엘리트 계층을 향한 예언자적 대안의 제시였다. 그는 여러 에세이를 통해 진정한 일본은 무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근면하고 정직한 보통 사람들의 땅’이며, “국위 선양이 반드시 국민의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역설했다.
1920년대 초, 황궁 맞은편의 대여 홀에는 노년의 우치무라가 로마서, 욥기, 그리고 사복음서를 절별로 강해하는 수업을 듣기 위해 매주 수백 명의 젊은이가 비용을 지불하고 모여들었다. 그는 새로운 교단을 세운 것이 아니라 무교회 운동을 창시했다. 이는 수입된 교단 형식이나 기독교의 제도화, 그리고 신앙과 천황 숭배의 결합을 거부하는 성경 중심적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였다. 재세례파와 유사한 면을 지니면서도, 무교회 운동은 일본 고유의 자생적 개신교 형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비록 우치무라 자신은 자신의 전통이 조직적으로 계승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말이다.)
영향력 있는 정치학자 난바라 시게루와 경제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를 포함한 그의 제자들은 1930년대의 군국주의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본인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과 전 세계에 만연한 이분법, 즉 한쪽에는 기독교 민족주의가 있고 다른 쪽에는 조국에 대한 혐오가 자리하는 구조는 우치무라에게 전혀 성립되지 않는 논리였다. 우치무라에게 예수와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복음의 빛으로 국가를 바라보는 일이었으며, 국가의 진정한 번영이 자기 과시나 군사력에서 오지 않음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우치무라는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을 사랑했던 방식으로 일본을 사랑했다. 조국이 진실하기를 바랄 만큼, 잘못을 범했을 때 따끔하게 지적할 만큼, 그리고 가장 어두운 시절에도 조국이 이룩할 수 있는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조국을 사랑했다.
정부의 행태에 점차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는 일본과 그 국민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는 1908년 영문 저서 《대표적 일본인》의 서문에서 이 마음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조국을 향한 젊은 날의 열정은 다소 식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내 동포들이 지닌 수많은 훌륭한 자질을 외면할 수 없다. 일본은 여전히 내가 ‘기도와 소망과 자유로운 헌신’을 바치는 유일한 땅이다.”
우치무라는 오늘날의 양 진영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민족주의자에게는 “당신은 참으로 조국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가, 아니면 은연중에 그 순서를 뒤바꾸었는가?”라고 묻는다. 진보주의자에게는 “당신의 비판은 조국과 국민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인가, 아니면 단순한 경멸에 불과한가?”라고 질문한다. 그는 두 질문에 삶으로 동시에 답했다. 그는 예수를 더 사랑했기에, 도리어 일본을 온전하고 정직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우상숭배가 대립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애국자는 조국을 향한 깊은 사랑 때문에 기꺼이 조국을 실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가즈사 오카야(Kazusa Okaya)는 더럼 대학교의 박사 과정 학자이며, 로잔 일본 차세대 지도자 세대(Lausanne Younger Leaders Generation Japan)의 운영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