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아래 누리는 쉼과 놀이의 신학

배경 설명

이번 주 개신교 신학 매체들이 공통으로 다룬 주제 가운데 하나는 쉼과 놀이(play)의 신학적 의미다. Desiring God의 글 Play Before the Throne (보좌 앞에서의 놀이, 번역)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를 빌려 놀이를 영혼의 기쁨을 위한 말과 행위로 규정하면서, 놀이가 단순한 여가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논증한다. 웃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사하크가 놀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어원 분석도 흥미롭다. 놀이는 소리로서의 웃음과 동형 구조를 이룬다. 웃음이 기쁨을 표현하고 강화하듯, 놀이는 기쁨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심화한다.

이 글은 놀이에 대해 단순한 심리학적 조언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 신앙과 직결시키고 있다. 우리가 놀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불안이며, 불안의 뿌리는 통제 환상이다. 현대 문명은 기술을 통해 인간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부추기고, 그 착각이 무너질 때 불안은 더욱 깊어진다. 반면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성도는 우주의 무게를 어깨에서 내려놓고 로마서 8장 28절의 약속 아래서 마음껏 뛰놀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섭리라는 놀이터(providence is a playground)에서 하는 놀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또한 현대 사회의 전면적 노동(total work)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철학자 요제프 피퍼(Josef Pieper)의 개념을 끌어와, 어려움이 가치를 보장한다는 칸트적 편견이 놀이를 경멸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모든 것을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는 논리를 고린도전서 4장 7절의 네가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으로 뒤집어버린다. 은혜로 받은 자녀는 놀지만, 공로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자는 쉬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The Gospel Coalition의 글 What Is a Christian? One Who Belongs.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소유와 성취가 아닌 소속으로 규정한다. 몸도 영혼도, 삶도 죽음도 내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다라는 고백은 불안을 해제하는 언어다. 두 글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쉴 수 있고, 쉴 수 있는 자는 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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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시사점

한국 교회와 목회 현장은 오랫동안 열심과 헌신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새벽 기도, 금식, 봉사의 문화는 분명히 귀한 유산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안식과 기쁨이 신앙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하는 풍토도 자라났다. 쉬는 것이 게으름처럼 느껴지고, 즐기는 것이 세속적으로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번아웃(burnout)을 경험하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이 글이 제시하는 신학적 프레임은 그 굴레를 끊는 데 유효한 자원이 된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다. 놀이는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의 표지다. 목회자가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쉬고 즐기는 모습을 보일 때, 회중은 성과 중심 신앙에서 선물 중심 신앙으로 전환하는 언어를 얻는다. 자녀 양육에서도 마찬가지다. 글이 마지막에 제안하듯, 자녀의 놀이를 허락하고 함께 노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함을 가르치는 가장 구체적인 신앙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