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맨리
Clinton Manley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선물에 둘러싸여 있다. 사방이 가로막혀 온통 그 선물에 부딪힌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베소서 5:18–20)
여기에 지질버트 키스 체스터턴(G.K. Chesterton)의 글에서 빌려온 하나의 사고실험이 있다.
대양을 항해하던 중 거대한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로빈슨 크루소처럼 결국 외딴 무인도 해변으로 떠밀려간다. 온몸에 걸친 누더기 옷 한 벌이 전부인 채로 며칠 동안 그곳에 고립된다. 오직 자신과 모래, 소금기 가득한 바다, 그리고 피할 길 없는 강렬한 태양뿐이다.
그러다 해변으로 상자 하나가 떠밀려온다. 뚜껑을 열어보니 물, 그것도 달콤한 생수다. 그때 얼마나 감사할지 상상해 보라. 이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할지 생각해 보라. 주님은 이것을 주실 이유가 없으며, 그것은 영영 바다에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다음으로 얕은 물가에 떠 있는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안에는 빵과 버터, 치즈와 말린 과일, 그리고 초콜릿 한 조각까지 먹을거리가 가득하다. 왕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 별미에 경탄하고, 그 맛의 훌륭함에 눈물 흘리며, 매 한 입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음미한다.
그 후 며칠 동안 다른 물건이 차례로 해변으로 밀려온다. 푹신한 의자, 옷 몇 벌, 해먹, 신발 두 짝, 그리고 물에 젖은 성경. 바다에서 건져낸 물건마다 하나님의 지문이 찍힌 특별한 보물처럼 다가온다. 파도를 헤치고 동료 선원 한 명이 걸어 나올 때는 감격에 겨워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그 순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이 실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선물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즉 ‘난파선에서 구조된 이’와 같은 절박한 감사를 표현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무인도의 표류자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것도 누릴 자격이 없으나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대가 없이 받았다.
영광을 높이는 감사
이러한 절박한 감사는 끊임없이 감사를 요청하는 바울의 집요한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감사는 바울이 가장 즐겨 명령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덕목이다.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아도 명확하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베소서 5:18–20)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17)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
바울이 이토록 감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진심 어린 감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어 “감사를 넘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한다”고 말한다(고린도후서 4:15). 이는 “내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라고 노래한 시편 기자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시편 69:30). 시편 기자는 또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메아리친다(시편 50:23).
이 신성한 논리는 완벽하다. 감사는 선물로 인해 유발되는, 선물을 준 사람의 선한 의지를 향한 기쁨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태도 자체가 곧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선물을 받을 때, 우리 안에 기쁨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이 기쁨의 향기를 우리는 감사함으로 선물을 준 분께 올려드린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은 감사함으로 선물과 그 선물을 준 이가 이어질 때 완전해진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감사가 시들해질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며, 우상숭배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사실을 바울은 인지했다. 불의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는 두 가지 근원적인 죄 중 하나로 불평을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그리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라는 구절에 주목하라(로마서 1:21). 우상숭배가 선물을 하나님보다 높임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라면, 감사는 선물을 하나님 아래에 둠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대면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분의 선물을 대면할 때 감사로 나타난다. 이는 의로운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선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역시 바울은 잘 알았다. 사방이 가로막혀 온통 그 선물에 부딪힌다. 야고보서 1장 17절을 상기해 보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야고보서 1:17). 지금 이 순간도 사방에서 쏟아진다. 디모데전서 4장 4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좋은 것은 우리의 기쁨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바울이 감사의 사도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감사는 기쁨을 배가하고, 우상숭배로부터 지키며, 선물을 준 사람을 높인다.
무관심이 낳은 불평
이 모든 사실이 참되다면, 우리는 왜 더 감사하지 못할까?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고백을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왜 이토록 자주 불평에 사로잡히는가?
대체로 불평 뒤에 숨은 핵심 악덕은 무관심이다. 사방에 널린 하나님의 선하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바울과 달리 우리는 충분히 난파당하지 않았고, 익숙함은 우리 눈을 가린다. 욕실 거울의 얼룩처럼 하나님의 선물을 너무 자주 마주하다 보니, 점차 감각이 마비되어 더는 영적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폐로 숨을 들이쉬며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감사한 때가 언제였는가? 호흡은 주님의 선물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사도행전 17:24–25). 1분에 십여 번, 하루에 2만 번씩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물질을 들이마실 때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감사하는가?
햇빛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계산하기조차 아득할 만큼 먼 우주 공간에 별 하나를 매달아 두셨다. 우주적인 잔치에서 축하 종이를 뿌리듯,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햇빛을 비추신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해를 떠오르게 하신다. 이 경이로운 현상을 두고 마지막으로 감사한 때가 언제였는가?
성경과 구원, 나무와 무릎, 의자와 카페인, 자전거와 공, 실내 배관 시설, 안경, 배우자의 미소, 베이컨 굽는 냄새, 그리고 색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물을 언급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색채라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선물인가!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것에 세심히 주목하지 않으면 감각은 식욕을 잃고 감사는 굶어 죽는다. 지금이라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난파선에서의 구출
난파선이라는 사고실험은 우리에게 경외감을 훈련해야 함을 알려준다.
주변의 사람, 별, 음식, 기술을 바라보며 무인도에 고립되었을 때 이것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해 보는 태도는 그래서 유익하다. 난파선에서 건져 올렸다고 생각할 때, 모든 선물은 비로소 본연의 경이로운 가치를 드러낸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실 이유가 없다. 특히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채가 없다.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라고 요구할만한 존재는 없다. 무(無)의 바다에서 창조적 말씀으로 불러낸 우리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즐거운 감사를 요구한다.
우리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버지가 베푸신 모든 선한 선물에 난파선의 생존자처럼 감사하기를 힘쓰자.
클린턴 맨리(Clinton Manley)는 디자이어링 갓(Desiring God)의 편집장이자 베들레헴 대학 및 신대원(Bethlehem College and Seminary)의 외래 강사다. 아내 매켄지(Mackenzie)와 네 자녀와 함께 세인트폴에 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