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브르비체크
Benjamin Vrbicek
“작은 죄가 쌓여 거대한 결과라는 큰 죄를 낳는다.”
결혼과 신학대학원 입학을 동시에 맞이했던 시절, 나는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모든 지식을 흡수하려 애썼다.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던 때였다.
어느 날 한 노교수가 일반 지역 교회에서 불륜이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경고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젊고 경험이 부족했던 터라, 그 문제는 교회 전체의 문제라기보다 그 교수의 사역에 결함이 있어서 생긴 일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온실 속 화초 같았던 내 삶과, 유명 기독교 지도자들의 간음 소식을 전하는 뉴스는 간음이란 내가 전혀 모르는 먼 곳의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20년 동안 결혼 생활과 목회 사역을 거친 지금, 나는 스승의 말을 신뢰한다. 여러분도 그래야 한다. 부부 관계가 아무리 견고할지라도, 남편 and 아내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의 경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고린도전서 10:12).
위험을 직시하는가
조심하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지역 교회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간음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뼈저리게 알지만, 과거의 나처럼 여전히 깨달아야 하는 이도 존재한다.
신대원 수업을 들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개인적으로 알던 이가 저지른 간음 사건을 십여 건이나 떠올릴 수 있다. 상상 이상의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 어머니와 아버지, 남편과 아내, 친구와 교인이 너무나 많다.
이들에게는 배우자뿐만 아니라 여러 자녀가 있는 경우가 많아, 한 번의 폭발이 남긴 피격 반경은 대략 100명에 이른다. 소그룹 성경 공부를 함께하고 여러 사역에서 동역하며 부대꼈던 가까운 친척이나 신앙의 형제자매 등 한 단계 건너선 이는 이 수치에 포함하지도 않았다. 충격적인 영향력이다.
바울이 성적 죄에 빠져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간음이 희박한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들이닥칠 수 있는 실재하는 위협임을 믿어야 한다.
사고가 아니다
간음을 설명할 때 ‘넘어지다’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할까? 보통 넘어짐을 말할 때는 도덕적 책임이 없는 우발적 사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영적인 넘어짐을 말할 때는 단순한 사고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신다(요한계시록 2:5). 히브리서 기자 역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한다(히브리서 4:11). 이러한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태만이 스스로를 서게도, 넘어지게도 만든다는 사실을 명시하며, 따라서 넘어짐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힌다.
겨울 폭풍이 지나간 뒤 얼어붙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면, 원인은 부주의나 둔함일 뿐 죄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매일 계단에 물을 부었고 겨울이 와서도 그 짓을 반복했다면, 얼음판을 만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때의 넘어짐은 결코 사고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넘어짐의 본질이 여기 있다. 아담과 하와는 단지 발을 헛디딘 게 아니었다. 바울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을 때는, 현재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고 죄의 행태를 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여전히 ‘정말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두 가지 관점으로 답하도록 이끈다. 한편으로는 다른 이와 결혼한 성숙한 두 신자가 갑자기 서로에게 황홀하게 매료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하는 태도는 병리적이며 해롭다. 자신과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근거 없는 피해망상은 건강한 성경적 인간관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런 징후도 없이 느닷없이 타인의 침상에 눕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론이 모세에게 “불에서 송아지가 그냥 튀어나왔다”고 변명했을 때(출애굽기 32:24), 우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문제는 모세가 자리를 비운 40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우상숭배에 둘러싸여 지낸 400년 세월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마음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저버리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날마다 행하는 회개를 거부한 채, 열심히 일했고 많은 것을 견뎌냈다는 이유로 ‘작은’ 죄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순간 예수에게서 멀어진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 포크레인이 아니라 저녁 식사 용 스푼으로 판 구멍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거대한 분화구가 된다.
‘작은’ 죄들과의 전쟁
고린도전서 10장 12절 바로 앞에 나오는 바울의 언급은 구약의 인물처럼 우리의 작은 죄가 결국 거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큰 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윗 왕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왕들이 출전하는 봄”이 되었음에도 다윗은 부하를 여기저기 보내는 대리 사역의 습관에 젖어 있었다. 그 결과 밧세바를 왕궁으로 부르고 우리아를 전장으로 내모는 행위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다가왔다(사무엘하 11장에서는 ‘보내다’라는 단어가 10회 등장한다).
결혼 생활에서 화해 없는 잦은 갈등과 회개 없는 침묵의 경멸은 치명타로 작용한다. 하나님 그리고 배우자와 함께 쉴 여백을 남기지 않는 분주한 삶의 속도가 결합할 때 위험성은 극대화된다. 이때 타인이 건네는 “가정을 정말 잘 돌보시네요”, “그 많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외모를 잘 유지하세요?” 같은 칭찬은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지극히 작아 보이는 죄, 사소해 보이는 원망,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소원함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부부 관계를 지키는 이 경계 태세는 바울이 죄에 빠져 넘어지는 위험을 경고한 직후에 한 말과 직결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고린도전서 10:13). 건강한 부부라도 언약을 깨뜨리는 일상적인 유혹에 직면한다. 이때 쐐기를 뽑아내려 노력하느냐, 아니면 망치로 쐐기를 더 깊이 박아넣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갈린다.
바울이 다음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20년 동안 사역과 결혼 생활을 이어오며 너무나 많은 가정과 사역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의 신실한 사랑이 불가능해 보이던 수준으로 사람을 치유하고 도우시는 과정도 보았다. 예수는 피할 길을 내셨고 견딜 힘을 주셨다.
간음이라는 비극적인 가능성이 실재하는 만큼, 인내하게 하시며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경이로운 약속 역시 실재한다.
벤자민 브르비체크(Benjamin Vrbicek)는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에 위치한 커뮤니티 복음주의 자유교회(Community Evangelical Free Church)의 담임목사다. 만물의 회복(The Restoration of All Things)을 비롯한 여러 책을 저술했다.